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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유산'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8.03.01 베푸는 삶 14
  2. 2008.02.08 늦둥이 12
  3. 2008.01.31 예배당 10
  4. 2008.01.29 Turning Point 13
  5. 2008.01.24 신앙의 유산 13
제가 아주 어렸을때 우리집 부엌은 앞뒤로 빗장을 지르는 문이 있고 마루쪽으로 작은 문이 하나 있는..좀 큰 부엌이었습니다. 한쪽으로 장작이나 나뭇가지들도 쌓아놓고..양쪽으로 큰 가마솥이 있었습니다. 그 부엌이 일주일에 한번은 목욕탕이 되기도 하였는데.. 가마솥에 뜨거운 물을 가득 데워 빨간 통안에서 목욕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겨울이면 춥다고 목욕하기 싫어하는 나를 억지로 데려가 어머니는 늘 때도 밀어주고 깨끗하게 해주셨는데..요즘 같으면 일주일에 한번 하는게 자주 안씻는거지만..그 시절만해도 자주 안씻은 사람이 명절이 돌아오면 깨끗이 목욕을 하던 시절이라.. 나는 왜 이렇게 자주 하느냐며 우는 소리도 했는데.. 그때 어머니는 내일이 주일인데 그럼 씻지도 않고 교회에 가느냐며 혼을 내셨지요.  아직도 그때의 그 습관이 있으셔서 그런지 널싱홈에 계신 지금도 매주 토요일이면 주일 예배를 위해 목욕을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손이 참 크십니다. 그냥 손이 아니라 베푸는 손 말이지요..


가마솥에 밥을 하실때는 전기밥솥도 없었고 여러가지로 열악한 환경이었는데도..늘 스텐레스 밥그릇에 밥을 떠서 뚜껑을 덮어 부뚜막이 따뜻할때는 부뚜막 위에..부뚜막이 식으면 안방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두시곤 하셨습니다. 추운날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오면 군불을 때서 따끈한 안방 아랫목에 무턱대고 손 발을 집어넣었다가 밥그릇을 엎기도 하였는데 어머니 아실세라 몰래 원상복구 한 적도 있었습니다.


늘 우리집은 밥을 넉넉히 하여 찾아준 사람이 없어 밥이 남게되면..그 다음날 아침 전날 남은 밥을 다시 새밥위에 얹어서 어머니랑 큰 언니는 약간 풀어진듯한 그 밥을 드셨습니다. 어쩌다가 많이 남아 언니가 내게도 퍼주면..새밥 달라고 밥이 맛이 없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요.^^;


얼마전 어머니께서 얘기하시는 중에..특별히 혼자 사시는 아주머니가 계셨는데..늘 그 분을 생각하면서 밥을 더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분이 "동생" 하고 부르면서 찾아오면 어머니는 싫은 내색없이 어서 들어오라며 방문을 열어주었고..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친후라도 항상 그분이 오면 밥을 차려주셨습니다. 혼자 사는데 밥해먹기가 얼마나 힘들고 외롭겠느냐며..


지금 생각하면 여러가지 일로 피곤하실텐데 어머니의 그렇게 몸에 밴 베푸는 삶이 너무 귀하게 느껴집니다.  저같으면 억지로 해주는것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날것 같으니까요.^^;;


전 사람들이 자주 집에 오는게 때론 귀찮아 인사도 안하고 내 방에서 꼼짝 안할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저를 늘 어머니는 믿어주시고 우리애가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대신 인사를 해주곤 하였지요..글을 쓰면서 예전 제 모습을 생각하니  깐깐한 사춘기를 보낸듯합니다.^^;


문득 어린시절 즐거웠던 기억이 하나 떠오르는데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아버지가 은퇴하시면서 우리집에 tv를 사오셨는데 다른 집에 tv가 많지 않았을때  tv를 사셔서 tv가 없는 동네 사람들이 저녁이면 집에 와 tv를 통해 뉴스도 보고 연속극도 보았습니다.


우리집 안방이 좀 크다고 아버지 친구분들이나 어른들이 오셔서 tv를 독차지 하면 저는 하는수 없이 다른집으로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기위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깝게 사는 친구네가 제가 좋아하는 연속극을 시청안하면 그걸 보기위해 멀리있는 다른 친구집이라도 가야했으니까요. 집집마다 tv를 갖게 되기까지 그렇게 동네잔치 하듯 친구들과 tv를 보러다니던 기억은 늘 즐거운 추억중에 하나인듯 합니다.


아버지가 은퇴하고 집에 계시면서 우리집은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는데.. 안채를 아파트처럼 신식 부엌에 화장실과 욕실을 넣고 보일러를 달았습니다. 군불을 안때도 되고..전기밥통에 밥을 하고..개스레인지에서 음식을 만드니 참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 된거지요.


어머니는 전기밥통이 생기자 누가 와도 식은밥 안줘서 너무 잘되었다며 좋아하셨고.. 언제든 아무때나 배고픈 사람이 찾아오면 금방 개스레인지에 국을 데워 줄수있으니 좋아하셨습니다. 일년에 몇차례 집에서 죽을 쑤면..동네 사람들이 "이집 죽썼다며?.." 지나가다 소문듣고 찾아와 먹고 가던 기억도 납니다..달리 베푸신것도 많았지만 항상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주던 기억이 제일 많아  어머니의 부엌이야기를 써봅니다.


인정이 많고 막내를 많이도 사랑해주셨던 어머니밑에서 자란탓에..저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가면서 고향을, 그리고 어머니를 참 많이 그리워했던것 같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친척 고모집엘 찾아가면 늘 엄마처럼 대해주셔서 그 고모집을 어머니가 보고싶거나 하면 찾아가곤 했으니까요.


그렇게 베푸는 삶을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똑같이 하셨습니다. 집에 늘 사람들이 찾아와서 북적여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으셨지요.. 객지에 일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어른들부터 동네오빠나 언니들.. 누구든지 집에 들러 아버지께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고..특별히 챙겨줘야할 사람들에겐 여비도 늘 주셨던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결혼하여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엘 가면 와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며 여비를 주셨습니다. 항상 제가 가져간 선물보다 더 많은 여비를 타오곤 했습니다. 싫다고 하여도 늘 빈손으로 자식들을 보낸적이 없는 우리 부모님..그렇게 남을 돕고 베푸는 삶을 당연한것으로 여기며 사신 부모님이 인생이 무엇인지 조금 알아가는 이제야....너무 존경스럽습니다.


Posted by 에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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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둥이

diary/예배/나눔 2008. 2. 8. 07:59
어머니는 오랜 세월..이민오시기 전까지 새벽제단을 쌓으셨습니다..새벽 기도가 끝이 난후..집에 오시면 자고있는 나를 깨워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다른 형제들은 모두 서울에 있고 시골엔 어린 저밖에 없어서 비어있는 방들이 있었습니다..방 하나에 도시에서 오신 전도사님이 사셨는데 그 전도사님이 우리집에 사시는 동안 (약 2년정도) 가정예배를 드리셨던것 같습니다.


전 아침 잠이 참 많습니다. 요즘엔 나이가 든 탓인지 눈이 떠져 잠을 더 못자지만..예전엔 누가 업어가도 모를정도로 그렇게 아침잠을 잤습니다..그런 잠꾸러기 딸을 깨우기에 도가 트셨던 어머니는 늘 먹는 흉내를 내시곤 하였는데.. 제가 초등학교 1,2학년 쯤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맛있는것을 먹는 흉내를 내시면 어김없이 속아.. 일어나 예배를 드리곤 하였고..못 일어나는 날이면 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는채로..그냥 예배를 드리곤 했었습니다. 그때일을 지금도 어머니랑 앉아서 얘기를 하며 웃습니다. 제가 그렇게 먹을것을 좋아했었나? 싶어서요..ㅎㅎ


그리고 난 후..아침을 만들고 일상생활을 시작하시던 우리 어머니..이런 어머니밑에 태어나게 된 것이 철이 든 이제야 저는 감사합니다.


큰 오빠 작은 오빠는 초등학교때부터 서울로 올려보냈지만..저는 막내인데다..늦둥이라 어머니가 빨리 올려보내고 싶지 않으셔서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니게 되었지요.


언니나 오빠들은 어려웠을때라 자라면서 집안일을 도와야 했지만..저는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컸던것 같습니다..^^; 그저 잘한게 있다면 방과후면 아버지를 도와 가게일을 도와주는거였지요..제가 집에 오면 아버지는 마실을 가시기도 하고..낮잠도 주무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제가 이뻐 서울에서 내려와 같이 살고 있는 큰언니가 내가 아무것도 안한다고 혼내면 오히려 내편을 들면서 막내때문에 우리가 가게도 한결 쉽게 꾸려가는데 왜 혼내냐며 언니에게 그러지말라고 하셨지요.


큰 언니랑 나는 나이차이가 22살 입니다. 언니는 급성뇌막염으로 기억을 잃었습니다. 어린시절 기억과 서울에서 양장점을 운영했던 기억은 하는데..기억 못하는게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는게 22살이나 많은 언니인데도 철없는 저하고 비슷하여 당연히 해야할 일들을 안하는 저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이것 저것 일을 많이 시킬려고 했는데..저는 어머니 빽을 믿고 미꾸러지처럼 잘 도망다녔던것으로 기억합니다. ^^;


우리집에서 처음 예수를 믿었던 큰 언니..언니는 우리 집안의 처음 열매라고 할 수있습니다..그런 큰 언니때문이라도 어머니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던것 같습니다. 처음엔 상태가 많이 안좋았던 언니도 일상생활을 무리없이 할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렸을적 서울에 있는 오빠나 언니를 방문하기 위해 시골에서 나는 특산물들을 보따리 보따리 싸들고 고속버스를 타면 늘 듣는 말이 있었습니다. "할머니..손녀가 참 이뻐요" 그러면 난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얼굴이 빨개지며 엄마 옆에서 저만큼 떨어져서 앉아있곤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소풍에 따라온다고 하면 싫어서 오지 말라고 했던 기억도 납니다.. 가끔은 다른 엄마들은 모두 젊은데 왜 엄마만 얼굴에 주름도 많고 늙었느냐며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도 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난 참 버릇없는 막내였던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엄마가 널 늦게 나서 그러지 않느냐며 웃으셨습니다.


그런 제가 어머니를 닮아 늦둥이 바다를 낳았습니다..우리 바다는 큰 누나와 띠동갑입니다. 아이가 많이 있는걸 좋아는 하지만 포기하고 있었는데 임신을 하여 처음엔 좀 당황했습니다..하지만 바다가 태어나고 주는 기쁨이 참으로 커서 얼마나 감사함으로 키우는지 모릅니다.


우리 부모님도 저를 그렇게 키우셨던것 같습니다..처음에 임신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유산하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생명을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며 못하셨다고 해요. 아버지 살아계실때..제가 부모님께 좀 잘해드리면 저를 앞에 두고 어머니가 아버지께 이렇게 농담하신적도 있으셨지요..그때 유산시켰으면 어쩔뻔 했느냐고..이렇게 귀한 자식인데..하면서 두분이 웃으셨습니다.


제가 태어났을때는 집안도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고..어머니가 그렇게 옛날처럼 농사일에 매달리지 않으셨던것 같아요.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때 은퇴를 하셨는데..우리집에서 언니나 오빠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하는데..저는 아버지께 반말로 얘기도 하고 애교를 떠는 유일한 자식이었던듯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힘든 미국생활을 하실때에도 다른 형제들에게 말 못하는것을 저한테는 하셨습니다..그런 아버지께 살아생전 더 잘해드리지 못한게 아직도 마음 아픕니다. 어머니께라도 잘해야하는데.... 저 살기 바빠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 불효자입니다.



Posted by 에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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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diary/예배/나눔 2008. 1. 31. 08:23
예전 우리 시골은 예배당이 없어 동사무소를 빌려 예배를 드리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여기저기 전전하며 예배를 드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던 중..우리 고향으로 이사를 오신 어머니의 먼 친척 동생이 계셨어요..나중에는 바로 윗집 아랫집 가깝게 살면서 그 친척집과 참 친하게 지냈는데..그 동생분이 참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머니에게 신앙적인 면에서 참 많은 도움을 주셨던것 같아요.


어느날인가 예배처소가 없는 시골교회를 위해 그 동생분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누님..교회를 지으면 참 좋을것 같은데..어디 마땅한 장소가 없을까요?" 그러자 어머니는..
"그럼..내가 묵혀둔 밭이 있는데..거긴 어떤가?"
"어? 정말이요. 누님? 그 밭이면 정말 좋은 장소지요.."


그렇게 해서 맨 처음 우리 고향에 교회가 지어지게 되는데.. 어머니가 묵혀둔 밭은 우리 부모님이 호적에 올려서 키워주신 첫째 오빠가 결혼하면 주실려고 사놓은 땅이었습니다. 그 밭 주변으로 그 오빠가 결혼할 신혼집도 사놓으셨는데..  그 밭 말고도 오빠가 결혼하면 먹고 살수 있는 다른 밭들도 있기에 어머니는 동네의 바로 중앙에 위치하고 초등학교도 가까운 그곳이 위치적으로 아주 좋아서 그렇게 선뜻 밭을 내놓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는 목수 아저씨를 불러서 몇명 안되는 교인들이 열심히 도와서 시골교회가 지어졌습니다..처음에는 마루바닥에 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렸는데 얼마나 좋았는지..그렇게 작게 교회를 시작했는데..교회에서 주일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되자 차츰 동네에 소문이 나서 온 동네 아이들이 거의 교회에 출석을 하였습니다.


부모의 반대나 혹은 흥미를 못느껴 교회를 안다니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모두 교회를 다니게 되자..주일날이면 심심하여 나중에는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교회를 왔습니다. 몇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교회가 얼마나 부흥이 되는지.. 그때 어머니는 정말 감사했다고 합니다.


주일학교가 부흥을 하게 되자..다시 넓은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부모들을 전도하게 되었고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씩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던 거지요. 주위 친척들도 아이들이 교회를 열심히 다니게 되자..작은집의 작은 어머니가 친척 어른분들중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시게 되었고..우리 시골 교회는 그렇게 점점 부흥이 되어 교회 안다닌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주일이면 예배당이 꽉 차기 시작했습니다..


큰 예배처소가 절실히 필요해지면서..어머니는 교회분들과 의논하여 다시 교회 주변 땅을 내놓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말로는 나중에 혹시 필요하면 쓰기 위해서 사둔 것이었는데 그게 교회건축을 위해 쓰여질 줄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그저..거느린 식솔들이 많다보니..아버지가 벌어주시는 돈을 가지고 땅을 사놓으셨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그게 우리땅인줄도 모르고 여지껏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열심히 교회일을 하시는것만 알았지 어떤 마음으로 그 일들을 하셨는지..얼마전에야 자세히 알게 된 참 한심한 딸이었습니다. 교회가 부흥이 되자 먼저 지었던 예배당은 주일학교 예배를 위해 교육관으로 사용하기로 하고..다시 또 크게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작은 사이즈가 아닌 좀 큰 건물이어서 도시에서 건축업을 하시는 고향출신의 목수아저씨가 다시 오셔서 교회를 짓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교회 사택까지 짓는 대대적인 공사가 펼쳐졌습니다. 많은 교회분들이 교대로 시간을 내서 헬퍼를 하셨고..중학생쯤 되는 아이들은 방과후면..벽돌나르기부터 여러가지 잡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예배당이 세워지고..사택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번엔 방석을 깔고 예배드리지 않고 긴 장의자가 들어가는 큰 예배당이었습니다..아담한 유아실도 있고 사방 유리창을 만들어 빛이 잘 들어오는 참 이쁜 예배당이었습니다..예배당이 건축되자 우리 어머니의 감격은 이루 말할수 없었던것 같아요..


어머니 말을 빌리면..아버지께서 슈퍼를 운영하신 관계로 물건을 쉽게 주문할 수 있었던 어머니가 헌금함을 주문하여 사다놓으면 헌금함 값이 헌금으로 들어오고..거울을 사다 걸어놓으면 거울값이..그렇게 어머니가 사놓기만 하면 교회분들이 서로 다퉈가며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날은 동네사람들이 어머니가 치신 뎅그렁하는 새벽종 소리가 시끄럽다고 말들을 많이 해서..서울로 일보러 가시는 전도사님께 촤임벨을 부탁해서 사왔는데..그 촤임벨 값도 헌금으로 들어왔다며.. "그때 참말로 감사했지..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멋있는지 아느냐..그런 자잘한 얘기하려면 끝이 없다.." 며 신나서 얘기해주셨습니다.


예배당을 재건축한  이야기들은..제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잘 몰랐었는데..어머니께서 최근 얘기를 해주셔서 자세히 알게 되었지요.  지금 제가 적는 글은 정말 간단하지만.. 어머니가 그 많은 농사와 집안일들을 감당하시면서 교회일까지 솔선수범하신걸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얼마나 부지런하신 분인지 그냥 느껴집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 어머니의 손 힘이 얼마나 쎄신지 모릅니다. 그런 어머니의 부지런함을.. 그 열정을.. 제가 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하신 어머니는 늘 토요일이면 교회에 청소하러 가셨습니다. 그때 큰 언니가 아픈 휴우증으로 시골에서 함께 살았었는데.. 큰 언니와 함께 두분이 매주마다 주일예배를 위해 교회 청소를 하셨습니다. 바빠서 늘 뛰다시피 걸어다니셨던것을 기억합니다..저는 뭐했냐구요? 저는 늘 가게에 잡혀있었어요..^^; 그것도 큰 일이라..내가 집안일 덜어주는게 좋다며 나한테 가게 보는 일을 맡겨놓고..큰언니랑 늘 그렇게 팀이 되어 교회일을 보러 다니셨지요.


가만 보면 우리 아버지는 평생 밖으로만 다니셔서 농사를 어떻게 지으실줄도 모르셔서 농사일은 어머니가 부탁하는 일만 해주신 듯 합니다. 가끔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논밭에 농약통을 매고 약을 치러 다니시고 집을 관리하신거 외에는..그래서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위해 슈퍼마켓을 운영하게 해주신듯한데..어머니가 참 지혜로우셨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크게 싸울줄도 모르고..과묵한 아버지에 상냥하고 부지런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저는 꼭 우리 부모님처럼 제 남편과 닭싸움 정도만 하면서 알콩달콩 잘 사는것 같습니다.^^




Posted by 에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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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ing Point

diary/예배/나눔 2008. 1. 29. 12:30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종손이셔서 많은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을 하는데..우리집 안채에 방처럼 생긴 엄마말 그대로 옮기면 마루방이라고 불리는 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곳에 돌아가신 조상들의 위령패를 모셔놓는 유리장이 있었는데.. 그 마루방에 늘 제사때만 되면 향을 피우고 음식을 차려놓았었지요.


제가 4살 되던 해라 하는데..아마 우리 바다만 했었던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던 큰 언니가  갑자기 급성뇌막염으로 많이 아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을 하였습니다. 그때 병간호를 위해 서울에 갔다가 서울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언니들의 전도로 어머니는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그때 서울에서 몇달 계시다 오신 엄마를 안 떨어지기위해..아니..엄마가 또 나를 놔두고 어디로 갈까하여 엄마가 밭에 가면 밭에 가는 길목에서 논에 가시면 논으로 가는 길목에서 엄마를 지켜보고 졸졸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 나로 인해 생겼던 여러 에피소드들이 참 많습니다.^^


언니들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시게 된 어머니는 처음엔 그저 자식들 때문에 교회를 다니셨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워낙 성품이 남을 돕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못보고 지나치시는지라 예배 처소가 없는 교회를 위해 집을 빌려주기도 하고..주의 종들을 위해 식사도 대접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던것 같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성경을 읽으실 수는 없지만 늘 기도하며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어머니는 점점 믿음이 단단해졌습니다..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믿음의 눈이 생기시게 되자.. 제사 지내는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셨던 듯 합니다. 하지만  처해진 입장이 종부이다보니 제사를 지내실수 밖에 없었지요. 예수를 믿고도 그렇게 열심히 제사때면 음식을 만들고 젯상을 차리던 어머니께서 큰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어머니의 눈이 안보이게 된거지요.  점점 시력이 희미해져가고 앞을 볼 수없게 되자..자신이 처한 상황을 놓고 기도를 하면서 일이 이렇게 된것이 사단의 역사라 믿고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돌아가신 눈먼 시어머니 귀신이 쓰였다..고 표현했습니다-  집안에 있는 조상들의 위령패를 모두 불태우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 일을 놓고  아버지와 의논을 하셨는데 그때 은퇴하시고 집에 들어오신지 얼마 안된 교회도 안다니시던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믿고 그대로 따라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눈을 고칠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된다는 마음이셨겠지요..그때 그 사건은 우리 고향에서 일어난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였는데.. 친척 어른들이 집에 찾아와 소리를 지르며 제가 기억하기론 큰 집의  작은아버지셨는데 술을 드시고 오셔서 행패를 부리고 어머니께 예수믿더니 미쳤다며 이제 우리는 망했다며 별의별 말을 다 했던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조상들의 위령패를 모두 불태우고 제사가 아닌 추도식으로 바꾸기로 작정한 어머니에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눈이 그냥 밝아지신거지요..할렐루야!  이렇게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신 어머니는 당신을 못마땅해하는 친척들을 위해..동네사람들을 위해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마도로스 생활을 접으시고 어머니께서 아버지 은퇴하시면 소일거리라도 하시라고 바깥채를 개조하여 만든 슈퍼마켓을 운영하셨는데.. 말이 슈퍼마켓이지..문방구도 있고 신발도 파는 그야말로 만물상 같은 곳이어서 아침이면 얼마나 바쁜지..전 학교가기전 잠깐이라도 가게에 나가 물건을 팔아야 했습니다..^^  이 후..교회를 안다니시던 아버지도 어머니를 따라 묵묵히 교회를 나가시게 되어 참 기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시절..어머니께서 집안 어른들의 반대와 동네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더 잘되어보라고 언니들(큰언니와 작은언니)을 서울로 올려보낸것이 우리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어 흉년에 다 굶어죽게된 가족들을 구원했듯이..우리 언니들을 통해 우리집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고..온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작은오빠가 현재 주님을 떠난 삶을 살고 있지만..하나님께서 작은오빠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오빠가 너무 늦지않게 주님앞에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에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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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널싱홈에 계시는 어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퇴원을 하셨습니다. 항상 간호원이 상주해있고 유태인 주치의가 틈나는대로 널싱홈을 방문하여 어머니의 건강상태를 첵업하는데..이번엔 혈압이 많이 높으시고 혈액이 깨끗치 못하다고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스웨디쉬 병원에 입원을 시키시고 어머니의 몸을 돌봐주신듯 합니다. 이머전시로 가신것이 아니기에 시간나는대로 어머니가 계시는 병원에 다녀오곤 하였는데.. 말동무가 없어 심심해 하시는 어머니에게 어머니께서 예전에 예배당이 없는 우리 고향에 예배당을 건축했던 얘기를 참 기쁘게 감사함으로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어렸을적 얘기라 대충만 알고 지냈던 이야기들..그리고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내가 모르던 교회 재건축 이야기들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좋았는지..자꾸 자꾸 들어도 신이났습니다. 어머니도 다른 얘기보다 교회 건축하는 얘기만 하시면 더 초롱초롱해지시고 얼굴이 편안해지심을 느낄수 있었습니다..훌륭한 신앙의 본을 가지고 계신 엄마를 대하면서 내가 엄마의 딸인것이 참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엄마에게 고백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 노안으로 눈이 먼 시어머니와 많은 전답을 가진 외아들인 아버지께 열일곱의 어린나이에 시집을 왔습니다. 어린나이에 친정이 가난하여 입이라도 덜어보고자 시집을 왔다고 하십니다.  우리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참 이쁘십니다. 해방전이라 아버지는 일본엘 가시게 되었고..어머니는 혼자서 그 많은 농사와 살림을 눈먼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꾸려가셨습니다. 그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집에와서 하루 일을 도와주면 보리쌀 몇되 퍼주면 되니까 일해주는 사람들을 데리고 그 모든 집안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어렸을적 나를 봐주는 언니도 있었습니다. 우리집에 와서 밥만 먹어도 좋았던 집들이 참 많았다고 합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더라도 농사를 지을수있는 땅이 있는 집들은 그래도 형편이 더 나았던것 같습니다. 집안일을 거들게 할 목적으로 우리집은 늘 함께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특별히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닐수 없는 형편의  친척오빠나 언니들이 자주 살았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이라도 좀 모으고 도시로 갈 길이 열려 도시로 나가면 또 다른 친척오빠나 언니들이 살러왔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 친척중에 일찍 부모님을 여읜 오빠와 언니를 데려다 키우시고 우리집 호적에  아들과 딸로 올리기도 하셨는데..그 오빠는 몇년전 병으로 돌아가시고..언니는 부산에서 사십니다. 호적상으로 보면 우리집은 9남매인 대가족이기도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낳으신 자식들은 모두 7남매로 제일 큰 오빠는 정말 영특했는데 어린나이에 죽었다고 합니다. 늘 그 오빠 얘기가 나오면 아쉬워하시지요.. 맨위로 언니가 셋이고..그 밑으로 아들 둘에..그리고 제가 막내입니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모두 서울에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양재기술을 배워 양장점을 차려 동생들이 좀 크면 모두 서울로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일손을 덜어줄 자식들이 없었습니다. 언니들이 집안일만 거들고 있기에는 너무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던 것 같습니다.  딸들을 공부시켜 뭐하느냐는 집안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일손이 많이 필요한데도 어머니는 자녀들을 모두 서울로 올려보냈다고 합니다. 더 잘되어 보라고..


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오신후..마도로스가 되어 해외로만 다니시다 4년 5년만에 한번씩 귀국하셨다 또 떠나는 직업을 가지셨기에 어머니는  인고의 세월을 참 열심히도 살아가신듯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사연이 너무 많습니다. 글을 배우고 싶어서 야학을 다녔는데..시어머니와 친척들의 반대로 그 뜻을 못이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안계시니..젊은 며느리가 밖으로 나다니면 혹 좋지않은 소문이라도 날 것을 염려하신 어른들로 인해 그리된듯 합니다. 아무튼 지금도 글을 못읽으시는 것을 그때 그시절 얘기를 하시며 속상해하시니까요.. 아버지는 글을 잘 쓰시고 일본어도 잘 하시니 아버지 돌아가시면 어찌사누..하셨는데 이렇게 널싱홈에서 숫자를 외워 엘리베이터도 잘 타시고..영어도 못하시면서 그냥 한국말로 간호원들에게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면서 얘기를 하시면 모두 알아들어 불편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물론 한국 간호사와 한국부 직원들이 있긴 하지만..가끔 자리에 없을때 하는 얘기입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 기억이 아직 초롱초롱 하실때..훌륭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신 어머니에 대해 기록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2탄,3탄..몇탄이 될지 모르지만..기대해주세요..ㅎㅎ

Posted by 에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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